더불어 사는 일터공동체, 여민동락

- 권혁범




시작

아침 7시 50분, 나는‘여민동락공동체’봉고차의 시동을 거는 일로 공식적인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학생 수가 부족해서 묘량에 하나밖에 없는 교육기관인 묘량 중앙초등학교를 폐교시킨다는 공문이 온 뒤로 지역민과 함께 작은 학교 살리기를 시작하면서 쭉 해온 일이다. 그때가 2010년이었다. 학교가 문을 여는 날은, 단 하루도 빠짐 없이 하루에 네번씩 통학차 운행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열두 명이던 학생 수는 올해 쉰여섯 명이 되었고 유치원은 다섯 명에서 스물여덟 명까지 늘었다. 작은 학교 살리기는, 지역민과 더불어 행복한 농촌을 만들자는 취지로 설립한 여민동락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지역사업이다. 더욱이 작은 학교의 장점과 가능성을 보고 아들 둘을 보내는 학부모였던 나로서는 사실 가장 마음을 쓸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8년 전, 대학 선후배 관계였던 세 부부가 저마다 가고 있던 길을 접고 뜻있는 사회적 실천을 약속하며 농촌으로 내려오기로 결심했다. 세부부 중에 지금 여민동락공동체 대표인 선배만 사회복지사 일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학교와 교회에서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다. 전부터 농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다들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깊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시절 가장 존경했던 선배가 어느 날 찾아와 귀촌을 제안했을 때 다들 솔깃했다. 각박한 도시생활을 접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사는 것,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변의 어려운 이웃과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회복지인으로 산다는 이야기는, 팍팍했던 당시에 삶의 청정제와 같았다. 더군다나 공기 맑고 일상을 자연과 함께 하는 농촌, 도시와는 달리 이웃 간의 정과 사랑이 넘친다는 농촌에서 산다고 하니 뭔가 인생이 달콤하고 여유로워질 것 같았다. 그래서 자격증이 없던 식구들 넷이, 선배의 제안을 듣고 바로 사회복지학과로 편입을 했고 내려올 무렵에는 모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우리가 내려와서 맨 먼저 시작한 일은 노인복지 사업이다. 농촌의 고령화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었으므로 아무래도 농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세 부부가 약속했던내용이있다.‘ 뭔가를새롭게시작했을때외부의지원으로자립이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과거 대부분의 복지시설들이 국가 보조금으로 연명하며 자생력과 내성이 없어져 결국엔 활동의 제약까지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기에 우리는 자립할 때까지 자력으로 일어서자고 했다. 그래서 없는 돈이지만 세 부부가 저마다 역량에 맞게 출자를 하고 거기에 맞는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재정적으로 어려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후원금이 늘어나게 되었고 1년 만에 노인복지 시설이 자체 운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립했다. 그런데 막상 농촌에서 일을 시작해보니 농촌복지의 방향에 심각한 고민이 들었다. 10년 뒤면 아이들이 없어 학교가 사라지고 노인들조차 돌아가시어 빈집만 무성한 농촌이 될 텐데 시설에서 노인분들 모시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도대체 농촌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깨진 독에 물 붓기이자, 자기만족밖에 더 되겠냐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논의 끝에, 경제적으로 어렵지만 몸은 건강한 노인분들을 위한 소득 창출 사업으로 모싯잎 송편 공장‘여민동락 할매손’을 설립했고, 농사(모싯잎, 콩류 들)를 짓는‘어르신 작목반’도 꾸려 함께 만 평의 농장을 일구게 되었다. 물론 초기 사업자금은 빚이었다. 농협에서 필요한 만큼 대출을 받았다. 초기엔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망하지 않고 잘 운영되고 있으며, 3년 전부터는‘동락점빵’이라는 작은 구멍가게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다른 면과 달리 사회적 인프라가 매우 빈약하다. 면 소재지가 행정 리보다 수준이 못하다. 어떤 이의 표현대로‘구매 난민’의 생활이다. 다시 말해, 모든 생필품을 거의 읍에서 사다 쓴다. 그런데 차가 없거나 건강이 불편한 노인분들은 그 일도 각오를 하고 나가야 한다. 그래서 사회서비스 개념으로 시작한 게 바로 동락점빵 사업이다. 개조한 용달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42개 자연마을을 돈다. 그리고 경로당에서 작은 장터를 연다. 차 스피커에서 점빵 차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나온다. “동락점빵 차가 왔습니다. 신선한 두부, 고등어, 콩나물…준비했습니다.”하는 소리는 이제 일주일에 한 번은 묘량면 거의 모든 마을에서 들려온다.


지금은 공동체 식구들이 열여덟 명이 되었다. 대부분 외지에서 귀촌한 식구들로 저마다 사업을 맡아 운영하고 있으며, 회의로 모든 걸 결정한다. 물론 지금까지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공동체는 늘 반목과 갈등이 생기는 조직이기에 서로에 대한 무한신뢰와 배려로 하나씩 극복하고 있다. 초기에는 세 부부가 지역에 되도록 빨리 안착하기 위해 어렵사리 마을의 빈집들을 수소문해서 따로따로 살림을 시작한뒤 같이 모여 공부도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앞서간 공동체 선배들이 겪었던 무수한 어려움을 배우면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지역사회에서 지역주민으로 자연스럽게 뿌리내리는 일터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가 가장 큰 숙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 주민으로 첫 걸음을 뗀 지 1년 반 만에 여민동락 노인복지 시설을 설립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난의 학습

여민동락의 초창기는 그야말로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난의 연속이었다.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농촌만이 가지는 고유한 문화와 규칙, 정서를 체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경제적 빈곤함은 어느 정도 각오하고 왔지만 내면의 빈곤함은 농촌살이, 공동체살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관계 맺기를 늘 어려움에 빠뜨렸다. 내려온 지 석 달쯤 되었을 때다. 면 소재지에 할머니 한 분이 운영하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는데 그 가게를 내가 인수한다는 소문이 돌았나 보다. 지역에서 만난 동생이 왜 인수하려고 하냐며 타박을 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무언가 빌미를 제공했을 것 같기는 한데 도무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1년이 지나 어느 정도 지역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무렵 본격적으로 지역아동센터 설립을 추진하면서 법적∙행정적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지역의 어느 단체에서 지역아동센터를 내부적으로 준비했고 나보다 먼저 행정기관에 1차 설립 신고를 한 것이다. 당연히 내가 할 줄 알고 있었던 담당 공무원은 급히 군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내용을 보니 지역에서 힘좀 쓴다는 그 단체가 일을 추진한 것이다. 그래서 부리나케 책임자를 만나러 가서 통사정을 했다. 교사의 꿈을 접고 내가 여기에 왜 내려왔는지, 어떤 꿈이 있는지, 전공자인 내가 왜 적합한지를 말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런데 그분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바로 며칠 뒤 설립을 완료했다. 그 뒤부터 그 단체와 관련있는 분들한테 나는 눈총의 대상이 되었다. 나중에 그 단체와 관련있는 국장의 이야기를 들었더니, 나를 비롯한 여민동락공동체가 그 단체의 요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아마 설날, 마을 어르신들이 손수 글씨를 써서 주신 복돈 봉투 내가 그때 말했던 내용에 상당한 불쾌감을 가진 듯했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또 정착 초기에 밭 600평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데 자연농법이니뭐니 말도 안 되는 농법으로 농사짓는다고 지역 형님과 어르신들께 툭하면 혼나고, 사람 소개해준다길래 따라간 자리에서 나름 최선을 다해 지역 형님들 누님들을 위해 기쁨조 역할을 했더니 품위없이 놀았다고 욕먹고, 이제는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지역아동센터 일조차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늘 자신감에 넘쳐 살아왔던 삶에 자괴감만 쌓이고 귀촌에 회의가 늘어갔다. 집에 틀어박혀 끙끙거리다 마을일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결국 마을에서 눈 밖에까지 났다. 거기다가 묘량에 유일하게 남은 초등학교가 폐교될 위기여서 여민동락공동체에서 봉고차를 사서 등∙하교 자원봉사를 하는데, 학부모들한테 돈 받고 사업한다는 소문까지 돌기도 했다.


나는 꽤 이타적이고 잘 돕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인데, 못된 지역 사람들이 지역의 각박한 인심이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하니, 불쾌감은 뒤로 하더라도 분노가 치밀어오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이럴 때마다 찾아가서 항의도 하고 적극 해명도 하고 싶었지만, 공동체 대표님의 말 따라 그냥 묵묵히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 뒤로 점차 시간이 흐르고 내 자신이 안정되면서, 사람이든 지역의 어떤 모습이든 불편하고 억지스러워 보여도 배경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며 결국 내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생 경험 많다고, 아직 젊으니 열정 하나로 섣불리 나섰다

가는 나중에 만만치 않은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내 경험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른 귀촌자들을 보면서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려온 지 2년쯤 되었을 때 귀촌한 40대 초반의 부부가 있었다. 그 부부는 작은 건설장비를 운영하니 지역의 작은 공사나 경지정리 일감을 얻으려면 지역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는 것도 일종의 영업전략(?)이었다. 그런데 그 부부가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부인이 마을의 분란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갈등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로 옆집에 살았는데 아마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마을의 복잡한 속내도 모르면서 갈등의 중심에 서버린 부부는 결국 마을 어르신들에게 찍혀도 단단히 찍혔다. 마을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일거리 하나 얻기가 쉽지 않은 처지가 돼버렸다. 나도 처음에는 한쪽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 마을일이 아니다보니 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내막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결국은 누구의 잘못이라 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물론 책임있는 자리에서 일을 추진했던 마을의 리더가 마을 공동체를 활성화하기 위해 수십 억 원의 지원사업을 진행하면서 당연한 투명성, 공개성, 민주성 같은 원칙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은 문제였다. 하지만 추진하는 사람들도 그러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예전부터 농촌에서 해오던 관행대로 하다 보니 마을 사람과 마찰이 생긴 것이었다. 굳이 책임의 소재를 따지자면 관의 무책임함과 직무유기가 가장 크겠지만, 마을사업에 대해 올바른 방향이 정립되지 못했던 10년 전 일이었다고 보면,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조정하고 통합할 것인지는 마을 사람 전체의 역량과 의식에 달린 문제였다. 결국 그 사업을 가져간 반대쪽 마을 사람들도 사업의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겉돌았으며 아무것도 진행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귀농/귀촌은 이런 마을로

더 많은 이들이 왔다갔지만 지금은 열여덟 사람이 함께하고 있는 우리 공동체에 새로 합류하는 식구들에게나, 귀농∙귀촌 교육을 할 때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직도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크게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공동체와 같은 조직에 들어가든 지역에서 농사를 짓든 개인 사업을 하든, 지역에 대충 발 하나 담그고 이 귀농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불안감에 떨면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 세상 어디에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대충대충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내 적성에 딱 맞는 귀농이란, 농촌에서의 일이란 거의 없다. 도시에서의 무한경쟁과 물욕주의, 인간소외를 벗어나 생태적 삶과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왔

다 해서, 생존을 도외시하고 나 혼자 착하게만 산다고 목표를 달성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런 분들이 늘어날수록 귀농∙귀촌에 대한 비관과 염세주의만 늘어날 뿐이다. 일이든 관계든 최고의 성실로 살아야 한다. 둘째, 적어도 1~2년은 묵언수행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주로 들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경청’이다. 초기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한들, 그것도 잘해야 본전이다. 원주민과 마을의 역사와 현재를 잘 이해하려면 끊임없이 들어야 한다. 듣고, 물어보고, 할 수 있다면 기록하는 것도 좋다. 세상에 어떤 기계보다도 가장 복잡한 게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관계와 소통은 늘 불안과 모순이 상존하며 과정은 복잡

하고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되돌아봐야 한다. 경청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자 내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전제로한다. 그러면 저절로 관계의 깊이는 깊어지고 넓어진다. 셋째, 질 높은 좋은 관계를 꾸준히 가져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존엄하게 존대하면 나도 존중받는다.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것이, 밑도 끝도 없이 형님 동생을 외치고 술로 밤을 지새우며 노래방에서 탬버린 흔든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협동으로 뭔가를 추진하는 사람들끼리는 불편하더라도 눈을 마주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지만, 그러지 아니할 때는 화이부동하는 마음도 필요하고 정 어려울 땐 한 발 물러서는 여유도 필요하다. 학교 살리기를 시작했을 때 지역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있었다. 그 중에 학교 살리기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았기에 내가 눈엣가시였던 사람이 있다. 어느 날 아주 험악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목소리를 높이며 자기 이익을 관철하려고 할 때, 나 고민 많이 했다. 끝까지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결국 그분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속으로는 분했지만 당장 그 일이 학교 살리기 자체에 큰 영향을 주거나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미래를 기약한 것이다. 마침내 4년 뒤 학교 살리기는 대세가 되었고, 그분은 욕심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 장학금도 주고있다.


관계 맺기는 성장의 밑거름

작년 하반기에 새롭게 귀촌한 분들로 공동체 식구가 많이 늘었다. 더불어 근심도 늘었다. 온종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공동체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다. 지연, 학연 어떤 것도 관련없는 사람들끼리 저마다의 삶터에서 온갖 사연을 품고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니, 설렘과 불편함은 늘 따라다닌다. 그런데 다르게 보면,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미지에 터잡기 위해 모여든 자체가 혁명일 수 있다. 공동체를 찾는 이는 대개 자기 색이 강하고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 그래서 뜻만 잘 모아내면 뭔가 일을 낼 멋진 집합이기도 하다. 결국 공동체도 규모에 맞는 살림운영 능력과 리더십 그리고 영성이 스미는 학습과 훈련이 필요해진다. 그래서 늘 우리는 성장의 기회에 노출되어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늘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낙관적 상상력에 푹 빠져 산다. 위기와 비관적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희망을 만드는 주체가 나임을 늘 생각한다. 그래서 실수와 실패가 두렵지 않다. 21세기 농촌은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 길에 귀농∙귀촌인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2014년 귀농통문 봄호 중에서..)


권혁범

전남 영광 묘량 여민동락공동체에서 센터장으로 일한다.




위치: 대한민국 전남 영광군 묘량면

대한민국 전라남도 영광군 묘량면